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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발랄

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쾌락의 순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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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는 것이.

그냥 신나게 흥겹게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뜻일까.

바치는 행위는 주고받음을 상정하지 않는다.

오롯이 나를 포기하고 내 전부를 어딘가에 거는 행위이다.

뒷감당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게 좀 흠이지만.

세상에 쾌락 추종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마당에.

반쾌락주의를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그렇다면 한없이 금욕주의자가 될 것인가?!

그런 뜻은 아닐 것이다.

 

한계가 있을 경우.

보통은 훨씬 감질나게 되어있다.

그러나 고삐 풀린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쾌락을 추구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한계 있는 생명체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마냥 쾌락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허무함이 기다리고 있을 뿐.

다 아는데도 잠깐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참 어렵다.

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것일까.

 

쾌락은 순간적이다.

습자지 같고 휘발성도 강하다.

그 잠깐의 충족감을 위해 모든 것을 거는 바보같은 행위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나 투명한 쾌락을 좇기에.

다른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우려하는 가족들의 모습이나.

걱정하는 친구들을 생각한다면.

쾌락 일면으로 달릴 수는 없는데 말이다.

특히 젊은이들이 극단적인 쾌락에 취약하다.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쾌락의 양면성을 꿰뚫고 있다.

허나, 가끔 이런 논리를 깨부수는 중장년층의 쾌락추구도 있기는 하다.

 

인간을 인간다움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지나친 쾌락 추구는.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냠냠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에게는  선택이라는 엄청난 특권이 있다.

우리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쾌락은 잠시 묶어두고.

조금씩 꺼내어 보상의 형태로 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쾌락 주머니를 모래시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아주 조그만 틈새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모래알처럼.

쾌락의 즙 한 방울을 위해 매일을 열심히 살아나가는 거다.

그 달콤함은 분명 배가 될 것이다.

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는 선택보다도.

안온한 평온에 나를 바치는 선택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지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장 맛보고 싶은 쾌락인가?

쾌락을 추구하는 무의지적인 충동인가?

나는 보다 나은 인간이고 싶기에.

단순하게 쾌락을 좇아가며 산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고귀하고 싶기에 쾌락을 유예한다.

오늘 아침 늦잠으로 허둥대던 나에게.

나는 쾌락을 선사해 버린 셈이다.

조금만 더 라는 마법의 말은 한없이 나를 과거에 묶어둔다.

현재를 사는 나를 뒤로한 채로 과거로 역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는 상황이 정말로 오늘 내 방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정신차리고 보니.

시간은 한참 나를 놓고 흘러가 버렸다.

해야될 일들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허망하게 서서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뇌한다.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자.

내가 제일 잘 하는 행동이지만.

절대 권하고 싶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걸 알기에.

후회 주머니는 꽁꽁 묶어서 매듭을 열기 어렵게 만들자.

당장의 쾌락을 위해 밝아오는 미래에 눈감지 말자.

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고 해도 순간일 뿐이다.

그 잠깐의 감동을 위해 일상에 실금을 내지 말자.

실금을 파고드는 유혹은 어마어마하다.

내일 하면 되지 뭐.

이 말은 마법의 말이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 버리는 주문.

의미 없어지고 붕뜨는 시간속에서 나를 주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게 될 것이다.

얄팍한 쾌락에 나를 바친다는 얘기는 이제 더는 듣고 싶지 않다.

현재는 가장 소중하니까.

현재를 과거에 가둬버리는 슬픈 일을 만들지 말자.

그러면 지금의 일상도 보상도 장기적 유예상태가 되고.

돌아올 기쁨은 배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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